예술성과 대중성, 그 간극에서
<검은 돌 : 모래의 기억> 비평문
현대 무용에 대한 직관적 이해
현대 예술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거쳐 이제는 컨템포러리 예술로 발전하였다. 그중에서 현대 무용 (Contemporary Dance) 또한 현대성을 표현하는데 Modern이 아닌 Contemporar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오늘날의 현대 무용이 시대 개념의 다원화를 토대로 '동시대성', '현대성'을 해부하고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 무용은 관객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용수들은 정해진 규칙을 파괴하고 반복성에서 탈피하여 불편함과 거북함을 만들어낸다. 다원화된 개념 세계에서는 규칙과 반복이 지닌 가치가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은 현대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표현방식을 끊임없이 창작해 나간다. 이는 아름다운 인체의 표현에 주목하였던 기존의 발레 예술과의 차이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현대 무용은 고전 발레가 지닌 유미주의의 반기로써 형식주의를 포기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정서적 경험을 표현하는 낭만주의 예술이다.
‘현대 무용이 어려워서 공연을 찾지 않는다’라는 문제의식은 현대 무용계가 갖는 커다란 이슈 중 하나이다. 현대 무용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기에 해당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 스스로 노력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러한 점들은 지금까지 현대 무용이 예술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많은 관객을 끌어오기 데 제약 요인으로 작동하였다. 그 중 주목할 사실은 우리나라 관객의 문화 수준이 급속히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를 예로 들면 이미 대중들은 좋은 작품을 직접 찾고 이에 소비한다. 사실 '기생충' 같은 영화도 무거운 사회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CGV 같은 기업들도 이러한 관객의 문화 수준 변화를 빠르게 파악하여 CGV 아트하우스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을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관심이 아직 무용 예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무용 예술과 예술영화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 무용 예술에서 창작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관객은 무용이라는 하나의 '언어'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와 달리 예술영화는 현대 무용과 비교하면 개인이 소화해야 하는 정보량이 낮아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관객은 무용 예술보다 예술영화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장르 간의 커다란 관객 수 차이는 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였는지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이를 단순히 공연내용의 어려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렵다. 대신 이는 안무감독&무용수, 공연기획자, 관객이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위의 예시에서 보듯이 문화 수준이 올라간 관객들은 내용이 어려워도 소비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에 현대 무용만이 지닌 낭만주의적 색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는 새로운 관객을 유입시키는 요인은 아니다. 기존의 무용 예술이 새로운 관객을 끌고 오기 위해서는 좀 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요소 또한 고려해야 한다. 무용 예술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는 관객들에게 현장 예술이 지닌 독보적인 장점을 보여준 뒤, 매력을 느낀 관객을 이러한 무용 장르를 더욱 접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순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무용 예술은 자신만의 ‘예술성’을 갖고 있되 ‘대중성’ 또한 살려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모순적 결론을 가능케 한 작품이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한 예시로 국립현대무용단의 <검은 돌 : 모래의 기억>을 제시해본다.
작품과 감독은 닮아있다.
작품을 설명하기 이전에 안성수 감독님의 특이한 이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인 그는 사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면서 유학길에 올랐지만 정작 그가 빠진 예술은 무용이었다. 그렇게 현대 무용과 발레를 전공하면서 그는 그 만의 방식으로 무용을 하였다. 독특한 그의 이력 때문인지 그의 예술은 다양한 시도의 연속이었다. 예를 들면 세계적 디자이너 정구호와의 협업과 같이 기존의 한국 무용에서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감각적이고 신선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보았을 때, 이번 <검은 돌 : 모래의 기억>은 그가 추구하는 현대 무용이란 기존의 낭만주의가 아닌 미적 요소를 중시하는 탐미주의 세계로의 회귀임을 알 수 있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느껴지는 느낌 그대로를 마음에 담아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소개 글의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기존의 현대 무용이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예술이라면 안성수 감독님의 작품은 관객이 생각보다 순간의 느껴지는 감정에 더욱 주목하도록 의도함을 알 수 있다. 그는 현대 무용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집어넣었던 난해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대신에 그는 모던발레에 주목하여 발레가 가진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비평가들이 그를 순수 추상 형식을 탐미하는 안무가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이러한 점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무용에 대해 많은 이해가 없어도 작품에서 보여주는 현대 무용이 지닌 아름다움에 쉽게 매료될 수 있다. 이는 그가 강조하는 현대 무용의 대중성으로 관객들에게 현대 무용이란 작품 향유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다. 실제로 공연당일 관객들로 꽉 채워진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어쩌면 안성수 감독님이 일궈낸 현대 무용의 부흥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음악과 춤의 찬연한 합일
이제 <검은 돌 : 모래의 기억> 작품에 대해 주목한다. 작품을 보는 내내 그저 안성수 감독님 작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대 연출이나 무용수의 동작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작품은 우리 몸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였다. 손가락 같은 미세한 몸의 끝부분을, 그다음 관절에서 마지막 몸의 중심까지의 움직임의 원리에 대해서 집중하였다. 이들 모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의식하지 않지만, 무용에서 기본이 되는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또한 미세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시작하여 본능적 움직임에 기초한 몸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표현하였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바로 국악 연주이다. 라예송 작곡가는 안성수 안무가와 기존 2번의 협업을 통해 국악과 무용의 아름다운 협업을 완성하였다. 이번 작품은 국악의 매력을 한 층 더 끌어올렸다. 한국 전통 음악에 무지하지만, 국악이 들려주는 하모니는 실로 대단하였다.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등의 국악기 음표 무더기에 몸을 실은 무용수들의 동작은 무용과 국악이란 장르 간의 협업이 가치 있는 예술적 활동임을 보여주었다. 국악 선율 사이사이에 무용수들의 춤이 더해져 안무가들의 무대가 더욱 돋보였다.
이 작품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안무가가 표현하는 내용에 있다. 바로 ‘우연이 나를 만든다’라는 점이다. 하인리히의 1:29:300 법칙이 있다. 어떤 대형사고는 단순히 몇 가지 원인 때문이 아닌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요소 때문에 발생한다는 통계적 법칙이다. 이처럼 나라는 사람은 작은 우연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하나의 커다란 결과물이다. 안무가는 이를 검은 돌이 모래로 되는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오랜 기간의 풍파를 겪어야만 검은 돌은 비로소 모래가 될 수 있다. 단순히 몇 번의 사건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작품은 그 오랜 기간 풍파의 과정에 주목하였다. ‘우연은 시간 위에 흔적을 남긴다. 시간에 새겨진 우연은 우리 각자의 존재를 고유하게 만든다.’ 또한 검은 돌 그리고 모래라는 소재에도 주목해보자. 감독은 모래의 비유는 곧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품은 모래가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 과정을 그린다. 그 흔한 모래 또한 모래가 되기 이전에 무언가였을 것이다. 모래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그렇게 찾아낸 자신의 과거를 통해 모래는 자신을 얽매인 기억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맞이한다. 우리는 여기서 트라우마라는 심리학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는 인간의 무의식이란 깊은 내면에 자리 잡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러한 무의식의 영역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받고 괴로워한다. 안무가는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트라우마를 이겨내어서 자신을 온전히 맞이하고 스스로 내면의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모래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올라가면서 결국 자신을 온전히 마주한다. 모래가 비로소 '자유로움'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작품에는 깊고 오래된 안무가의 고민이 담겨있지만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아름다우면서도 잔잔하다. 무용이란 순수예술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성을 담으려고 한 안무가의 시도이다. ‘기억을 찾았다는 것은 모래가 더 잘게 부서질 준비가 된 것이다. 과거를 알았으니, 자유로워진 것이다.’
관객으로서 무용 예술에 대한 고민
안성수 감독님과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예전에 안성수 감독님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드린 질문이 이러하였다. "오늘 같은 오픈 클래스는 직접적인 마케팅 수익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배우와 감독이 야근까지 하면서 이를 진행하는 이유가 어떠합니까?" 대답은 이러하였다. "좋은 관객을 얻고 싶었습니다. 무용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 깊은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관객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이는 인터뷰 뒤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은 관객이 왜 필요할까 라는 고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술의 다양성 때문이다. 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해당 예술에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야 한다. 예를 들면 영화나 음악 같은 대중예술은 감상평론가가 하나의 직업이 될 만큼 수많은 대화와 비평이 존재한다. 이러한 대화가 다양한 피드백을 만들어내며 무용 예술을 점차 나아가게 한다. 이처럼 대화에 참여하는 자들이 단순히 무용 예술 종사자뿐만 아니라 관객도 될 수 있다. 감독님은 무용에 대한 오랜 고민을 통해 건강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관객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작품은 대중들이 쉽게 빠져드는 요소들을 배치한 작품으로써 작품의 예술성에 많은 의문을 제기되는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비판을 감독님이 의도한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 작품에 대해서 건강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예술 문화를 조성하여 무용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점 또한 이전에 언급한 대로 안무감독&무용수, 공연기획자, 관객이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세 역할 중 관객으로서 앞으로 예술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였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많은 관객이 필요하다. 모든 순수 예술계의 공통된 고민이지만 특히 무용 예술을 접하는 관객은 매우 적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관객 수가 늘어나더라도 관객들이 좀 더 가치 있는 작품을 찾고 이에 소비할 수 있는 문화 수준 또한 필요하다. 안성수 감독님은 이를 실현 시키기 위해 국립무용단 단장으로서 관객문화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관객들과 좀 더 가까이 만나면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않을까 싶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오고, 그들의 문화 수준을 키워내는 어찌 보면 기획자의 역할을 안무가가 한 것이다. 언젠가는 무용 예술이 많은 관객으로부터 사랑받고, 그들에게 어떠한 점이 예술적이었는지 깊은 토론이 오가는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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