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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Catholic

가톨릭 창세기 연수의 불편함에 대해서

623. 고상혁 바실레오 왕십리성당

 

 

천주교를 사랑하기에 쓴 글입니다.

 

 

천주교를 선택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천주교를 사랑하기에 쓴 글입니다.

교회와 주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번 연수 중 제 믿음의 과정에서 느꼈던 불편함에 논하고 싶습니다.

 

저는 천주교를 선택해서 찾아왔기에 교회 또는 성경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종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이를 이해하려는 많은 고민들을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연수 과정에서 어떠한 불편함을 느꼈으며 

이는 단순히 제 배움의 부족함 때문이기보다는 프로그램 자체의 문제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느낀 불편함을 이렇게 사람들과 공유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좀 더 고민해야 되는지 논하고자 합니다.

 

 

제가 수많은 종교 중에서도 천주교를 선택한 이유는

이 곳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부분에서는 보수적으로 보이더라도 

실제 성당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굉장히 진보적이고 혁신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가치, 이는 저만이 아닌 타인에게까지 확장되는 실천적인 개념입니다.

그렇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나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한 개인으로 존중함으로써

그들에게 평등의 원칙에 따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창세기의 말씀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합니다.

종합해서 천주교는 현대적 의미로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종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수에서 처음으로 이 종교가 강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창세기 성서 연수는 엄연히 연수이기 때문에 배움의 특성이 강함을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휴대폰을 걷거나 시계를 봉헌하는 행위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수는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유 때문인지 

프로그램 간의  느꼈던 감정의 편차가 굉장히 심하였습니다.

미사 후 우리는 성가를 부르고 이에 더해 율동을 더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더 나아가 식사 후에도 소화제라는 이름으로 율동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율동 뒤 분위기를 바꾸어 우리는 그룹 만남을 진행하면서 개인의 인생 굴곡에 대해서 나눔을 갖었습니다.

그동안 창세기 성서모임을 통해 나눔에 대해서 경험을 하였지만

저는 이번같이 당장의 처음 본 사람들과 인생의 굴곡을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저의 이야기에 공감해준다는 믿음도 없없을뿐더러

당장 그들에게 솔직히 제 이야기를 함으로써 얻는 어떠한 이익조차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제 과거를 언급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저는 이를 빈칸으로 채웠고 나눔 당시 다른 사람들 또한 개인의 빛나던 순간만을 언급하였으니

이러한 불편함은 저만 느낀 바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뒤 우리는 떼제 미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전에도 저는 떼제미사를 경험하였지만 

이번에는 굉장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떼제 미사 간에 자유기도를 넣어서 

사람들의 개인적인 고민이나 사연을 털어놓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 곡을 부른 뒤 10명가량이 말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니

강요한다는 표현도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왜 제가 이 자리에서

남들의 고민을 듣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5만원을 내고 간 연수에서 

저는 아무 때나 타인의 이야기에 얼마나 쉽게 공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인지 

시험받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신부님께 고민을 털어놓을 때 

저는 적어도 미리 연락을 드리고 시간 등을 조율한 뒤 

조용한 곳에 가서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제가 신부님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를 다짜고짜 카페로 끌고 가서

제 개인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저는 현재 중고등부 교사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은 저의 공감능력을 시험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면서 그 자리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장 큰 이유는 위 모든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과정을 전부 다 참여했어야 하였고 

타인의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연수라는 이름으로 제가 타인의 슬픔을 강압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마치 제 신앙심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제 스스로를 깊이 의심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 신앙심의 문제보다는 연수 진행 절차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그런 겁니다. 연수란 다 그런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점을 봉사자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짧은 시간이었고 당시 상황이 개인적인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겁니다. 연수란 다 그런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점이 문제인지 그러한 문제의식을 전혀 공감하는 태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들은 봉사자로서 가르침을 준다는 입장에서 

굉장히 선민 주의적 태도로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프리카에 심한 가난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봉사하러 가서 가난한 아이가 저에게 우린 왜 가난한가라고 물으면

그들에게 "아이들아 가난이 문제가 아니다. 주변을 돌아봐라 

너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가난하다

가난은 이곳에서는 당연하거다

그러니 문제의식을 갖지 말고 살아가거라"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단 어느 사회나 상황에서든지 부당함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불편함이 과연 정당한 이유와 과정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이에 부당한 요소가 개입되었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연수가 강압적이고 주입적이었다는 측면에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연수가 강압적이고 주입적이었다는 측면에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가르침을 주려는 가치와 내용이 올바르다 할지라도 누군가가 불편을 제기하면 

이를 배우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과연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 우리는 적어도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위와 같이 당연한 것이라고 대답을 한다면

우리는 결국 창세기 연수는 단지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제가 그간 알고 있는 가톨릭이 아닙니다.

 

가톨릭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고 개인의 선택권을 인정합니다.

이 말은 즉슨 누군가가 자유의지에 따라 문제 제기를 하였을 때에도 

당대에 맞는 방식으로, 현대로 생각하면 민주적인 토론 방식으로 

이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민주시민이 지향해야 할 방식이고 또한 

성당의 발전을 위해 신자들이 충분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종교라는 이유로, 특히 연수는 원래 그렇다는 이유로 거부가 된다면

저는, 특히 천주교를 선택한 저로서는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그리고 제가 이 곳에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지 

다시금 고민해봐야 합니다.

 

연수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을 당연시 여기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연수를 통해 교회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그럼으로써 좀 더 교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을 사랑하고 이곳에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교회의 나아가는 길이 좀 더 발전이 될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연수를 포기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연수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을 당연시 여기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불편함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 또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이 글에 반대하신다면 과감히 저의 문제를 지적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의 이 글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해주신다면 

이에 대해 소중한 의견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